기술보다
증거
사흘간 코엑스에 있었습니다. IR 피칭 5개사, 기술 세션 10개, 찍은 슬라이드 137장. 반도체 설비 지능화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서 3일간 여정의 기록에는 기술 이야기보다 "어떻게 팔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창업자에게 실제로 쓸모 있던 여덟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다섯 개의 IR 자료에서 뽑아낸 공통 규칙
무대에 오른 다섯 곳은 업종이 전부 달랐습니다. 하드웨어 설계 AI, 제조 운영 레이어, 기기 내장형 보안, 심전도 AI, 바이오. 그런데 설득의 구조는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 기업 | 하는 일 | 무대에서 보여준 숫자 |
|---|---|---|
| SECA | 하드웨어 설계 AI (도면·회로도·BOM을 하나의 설계 그래프로) | 설계문서 검토 6시간 → 24분 설계공수 월 480h → 160h |
| 퓨처워크랩 | 제조 AI 운영 레이어 (업종 판단기준을 제품에 내장) | 생산 스케줄링 1시간 → 5분 불량원인분석 4~6시간 → 20분대 |
| 메디팜소프트 | 심전도 AI (심방세동 선제 예측) | 12개월 선행 AUC 0.963 등록환자 176,090명 |
| Biobytes | 근감소증 진단·신약 (종단 바이오뱅크) | 스크리닝 AUROC 0.903 현행 표준 SARC-F는 0.607 |
| ArbaLabs | 기기 안에서 도는 자율 AI 블랙박스 | 판단당 증거 0.04KB 배포 300~500KB, GPU 불필요 |
SECA는 여기서 한 걸음 더 갔습니다
"검토 시간이 줄어든다"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당 연 4,700만원 ÷ 240 근무일을 계산해 설계 변경 1건당 150~200만원 절감이라는 단가를 만들었습니다. 구매팀이 결재 올릴 때 쓸 수 있는 형태로 숫자를 가공해 준 겁니다.
메디팜소프트는 비교표를 축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경쟁사와의 대비표를 기능 나열로 채우지 않고 예측 구간이라는 단일 축으로 세웠습니다. 12개월 대 1개월, AUC 0.963 대 0.79, 등록환자 176,090명 대 1,901명. 표 하나가 "우리가 다른 리그에 있다"를 말합니다.
그리고 매출 0인 회사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ArbaLabs는 공공 파일럿 3건 선정, 에어버스와 NDA(비밀유지계약), 국제 대회 2위까지 나열한 다음, 슬라이드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당신 회사의 "AUC 0.963"은 무엇입니까. 제품 설명이 아니라, 고객 환경에서 측정된 숫자 한 줄. 그게 없으면 자료의 나머지 스무 장은 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직 매출이 없다면, 감추는 대신 그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를 같은 급으로 명시하십시오.
가격표 — 실제로 얼마를 받고 있나
B2B 창업자에게 가장 구하기 어려운 정보가 남의 가격표입니다. 이번 IR에서는 세 곳이 실제 단가를 공개했습니다. 세 곳의 구조가 서로 달랐고, 그 차이가 더 유익했습니다.
| 기업 | 가격 구조 | 설계 의도 |
|---|---|---|
| 퓨처워크랩 | 개념검증 3,000만 → 본구축 5,000만~2억 (단건) → 연간 운영 5,600만~1억3,600만 |
작게 시작해 갱신으로 넘어가는 3단 사다리. 고객은 첫 결재를 3,000만원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
| SECA | 모듈당 연 2억 / 10명 유닛 객단가 = 모듈수 × 유닛수 × 2억 |
곱셈식 확장. 연 2억 → 6억 → 18억이 같은 계약서 안에서 일어난다. 고객사에 맞춰 시스템을 지어 주는 구축 대행(SI)은 배제 |
| ArbaLabs | 통합 €30~60K (1회) + 연 라이선스 €20~35K + asset당 €200~12,000/년 |
고객 자산이 늘면 자동으로 매출이 늘어나는 대수 기반 과금. 400대 → 1,200대에서 반복매출이 2배 |
세 곳의 공통점
- 사다리가 존재합니다. 단일 가격이 아니라 단계가 있고, 고객이 그 사다리를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게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업 도구입니다.
- 진짜 사업은 3단계입니다. 구축비는 현금흐름이고 반복 라이선스가 회사의 가치입니다. SECA는 누적매출 7억 중 반복 라이선스 2.2억을 따로 떼어 말했습니다. 심사역이 보는 숫자는 그쪽입니다.
- 구축 대행(SI)은 명시적으로 배제합니다. 매출은 나지만 기업가치에 배수가 붙지 않는 매출이기 때문입니다.
가격표가 없으면 "얼마예요?"에서 대화가 끊깁니다. 금액이 맞는지는 나중 문제고, 미팅 자리에서 즉답할 수 있는 세 개의 숫자를 먼저 종이에 적어 두십시오. 그리고 3단계 중 어디가 반복매출인지를 스스로 명확히 해두십시오.
고객은 새로 찾는 게 아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두 번 창업한 분의 세션이 이번 서밋에서 제일 실용적이었습니다. 시작이 이랬습니다.
마지막 항목이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심이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unfair advantage — 남들은 갖지 못한 나만의 강점은 어디서든 나올 수 있고, 그게 어디인지 정직하게 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곧 첫 고객의 좌표입니다. 이미 반경 안에 있는 사람이지, 새로 찾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service-as-a-software 파일럿 — 네 단계
임원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제로 매달 야근하는 실무자가 최적입니다. 이 사람이 사내에서 당신 대신 설득해 줍니다.
혼자 콜드 어프로치하지 않습니다. 전도사가 자리를 만들고, 당신은 그 자리에서 세 가지를 말합니다.
무료여도 됩니다. 범위는 업무 하나로 못 박습니다.
LOI(Letter of Intent)는 유료 전환 서약서입니다. 파일럿이 끝난 뒤가 아니라 시작하기 전에 서명받습니다."기간이 끝난 뒤 성공이든 실패든, 계속 쓰겠다면 요금을 지불한다."
발표자는 이 방식으로 지난 회사에서 고객 3곳으로부터 $2M(약 28억 원)을 만들었습니다. 컨설팅으로 시작해 엔터프라이즈 SW 계약으로 전환한 매출이었습니다.
영업 대화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세 가지
| 요소 | 실제 문장 예시 |
|---|---|
| Pitch the impact | "우리는 귀사의 $100M(약 1,390억 원) 마케팅 예산에서 효율을 X% 개선할 수 있습니다" — 숫자가 먼저, 기능은 나중 |
| Show feasible path | "Google·Meta API를 이용해 사람 개입 없이 귀사 캠페인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 어떻게 가능한지 |
| Convince leaders | "저는 Expedia, Meta, Snap 등 복잡한 조직에서 이미 이걸 해봤습니다" — 왜 당신인지 |
그리고 프레이밍에 관한 경고 하나
"구매 프로세스가 12개월이라 안 됩니다"를 들었을 때
세션에서 제시한 네 개의 우회로입니다. 넷 다 제품을 더 만들지 않고 지금 상태로 돈을 받는 방법입니다.
- 컨설팅 선행 — 내 시간을 컨설턴트로 팔고, 임팩트가 증명되면 SW 계약으로 전환. 계약서에 전환 조항을 미리 넣습니다.
- 얼리 커스터머 딜 — 초기 제품을 시도하는 리스크에 대한 보상. 라이프타임 딜, 고정 단가.
- 디자인 파트너십 + LOI — 함께 제품을 다듬는 조건으로 무료 제공하되, 유료 전환 서약서를 받습니다. 발표자는 자금조달 진입 시점에 LOI 5건을 들고 있었고, 그게 투자자에게 가장 강한 신호였다고 말했습니다.
- 새 고객 프로파일 — 대기업이 안 되면 창업자·소규모 기업. 대표가 직접 결정하고 다음 달에 시작할 수 있습니다.
15영업일 PoV, 그리고 GO / 보완 / STOP
PoV는 Proof of Value, 가치 증명입니다. 기술적으로 되는지를 보는 PoC(Proof of Concept, 개념 증명)와 달리, "우리 돈 주고 살 가치가 있나"를 고객사의 숫자로 판정합니다. PoC를 돌려본 창업자라면 아래 문장들이 하나하나 아플 겁니다.
착수 전에 합의하는 다섯 개의 기준
품질 · 처리시간 · 비용 · 통제 · 현업 사용성. 이 다섯 개의 목표치를 구현 시작 전에 문서로 합의합니다. 그리고 종료 시점의 판정은 셋 중 하나입니다.
| 판정 | 의미 | 다음 행동 |
|---|---|---|
| GO | 합의한 기준을 충족했다 | 본구축 범위 설계로 진행 |
| 보완 | 가능성은 확인됐으나 조건이 부족하다 | 범위·데이터·기준을 보완해 재검증 |
| STOP | 이 업무에는 맞지 않는다 | 추가 투자 중단 |
STOP이 선택지에 들어 있다는 게 핵심입니다. 판정 기준 없이 시작한 PoC는 끝나지 않고 흐지부지됩니다. 흐지부지된 PoC는 실패보다 나쁩니다 — 리소스는 다 썼는데 배운 게 없습니다.
업무 하나를 15영업일로
과제 1건 · 대표 데이터 · 현업 담당자 · 보안 환경. 이 넷이 합의되지 않으면 착수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업무가 몇 시간 걸리는지부터 측정합니다.
누가 무엇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여기서 정합니다.
예외 케이스를 여기서 드러냅니다. 데모에서 숨기면 본구축에서 터집니다.
GO / 보완 / STOP.
발표자가 붙인 한 줄이 전부입니다. 기간을 줄이는 핵심은 단계를 생략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고객에서 제품인지 용역인지 갈린다
B2B 딥테크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심사역 질문이 "그거 결국 SI 아닌가요?"입니다. 이번에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을 두 곳이 각각 보여줬습니다.
퓨처워크랩 — 지식을 3층으로 쪼갠다
| 층 | 담기는 것 | 재사용 |
|---|---|---|
| 고객 누적층 | 그 회사만의 기밀, 사내 별칭, 작업 표준, 판정 기준, 결재선 | 불가 |
| 업종 패키지 | 같은 업종 전부에 해당하는 설비·공정·거래형태·업종 규정·판정 절차 | 가능 |
| 공통층 | 전 고객 공통 — 실체, 관계, 측정량, 물성, 규정 표현형식, 사고구조 | 가능 |
이 구조 위에서 그들의 확장 논리는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첫 고객은 3층 전부 신규, 같은 업종의 다음 고객은 1층만 신규, 같은 고객의 다음 업무는 신규 0. 원가 곡선이 어떻게 꺾이는지를 그림 한 장으로 보여준 겁니다.
SECA — 70 대 30
같은 얘기를 비율로 말했습니다. 플랫폼의 70%는 산업 공통 자산이고 30%만 기업별 커스텀. 숫자 하나로 "우리는 매번 새로 만들지 않는다"가 전달됩니다.
Biobytes — 하나의 자산, 세 개의 사업
15년간 3개 병원에서 모은 종단 바이오뱅크 하나가 신약 타겟 발굴 · AI 스크리닝 · 건강기능식품 세 개를 동시에 굴립니다. 슬라이드의 표현이 정확했습니다 — "One longitudinal data asset powers both target discovery and clinical phenotyping."
자료에 "동일 업종 두 번째 고객의 재사용률 X%, 도입 소요 Y일"을 넣을 수 있으면, "결국 고객마다 새로 만드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두 번째 고객에게는 이미 만들어 둔 것을 그대로 다시 씁니다. 새로 만드는 게 아니니 사람이 덜 들어가고, 그래서 매출이 두 배가 돼도 인력은 두 배가 되지 않습니다. 퓨처워크랩이 18개월 마일스톤의 첫 번째 증명 과제로 잡은 것이 정확히 이 항목이었습니다. 아직 두 번째 고객이 없다면, 그게 다음 목표라는 뜻입니다.
좁고 깊게 — 문제정의의 사다리
기조 세션에서 나온 예시인데, 반도체를 몰라도 사다리 자체가 그대로 쓰입니다.
| 질문 | 상태 | |
|---|---|---|
| 1 | 우리 반도체 회사가 매출을 늘리는 방법은? | 넓고 얕음 |
| 2 | 메모리 반도체 제품의 수율을 올리는 방법은? | ↓ |
| 3 | 불량률 감소를 위한 품질관리 방법은? | ↓ |
| 4 | 데이터 분석을 통해 불량 원인을 식별하는 방법은? | ↓ |
| 5 | 특정 메모리 제품 웨이퍼의 불량 패턴(center, edge, scratch, ring, random, local)을 자동 감지하자 | 좁고 깊음 |
5번까지 내려가야 필요한 데이터가 특정되고, 성공 여부를 측정할 수 있고, 누가 돈을 낼지가 명확해집니다. 1번은 창업자에게는 야심이지만 고객에게는 "우리 얘기는 아니네"로 읽힙니다.
지금 회사 소개서 첫 문장이 위 사다리의 몇 번인지 세어 보십시오. 1~2번이면 아직 팔리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범용성은 아키텍처 원칙으로 안에 두고, 밖으로는 5번 한 문장만 내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AI기본법은 이미 시행 중이다
기술 세션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언급된 날짜가 2026년 1월 22일이었습니다. AI기본법 시행일입니다. 여러 발표자가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 "근거의 문서화가 법적 요건이 됐다."
위험 등급에 따라 자율성을 설계한다
| 위험도 | 업무 유형 | AI의 역할 | 사람의 역할 |
|---|---|---|---|
| 낮음 | 조회 / 요약 | 자동 처리, 근거 제시 | 개입 없음 |
| 중간 | 초안과 추천 | 정책 검사 후 생성 | 담당자 검토 및 승인 |
| 높음 | 고위험 판단과 외부 실행 | 분석 / 제안 | 명시적 권한 · 최종 승인 · 감사기록 |
세 줄 중 실제로 어려운 건 맨 아래입니다. 고위험 판단과 외부 실행은 기술 난이도가 아니라 책임 소재의 문제라서, 누가 승인하고 무엇을 기록으로 남길지를 고객사와 하나씩 합의해야 합니다. 저도 이 단계는 조사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이고 검증 기간도 가장 길게 잡아 두었습니다. 위의 두 줄보다 훨씬 천천히 가야 하는 구간입니다.
그리고 흐름이 하나 더 바뀌었습니다
돈은 넘치는데 기준은 그대로다
투자 동향 세션의 숫자는 화려했습니다. 2026년 상반기 글로벌 벤처투자 $510B(약 709조 원) — 2025년 연간 전체($440B, 약 612조 원)를 여섯 달 만에 넘겼습니다. 1분기 기준 AI가 글로벌 벤처펀딩의 81%, 2년 전에는 30%대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세션의 마지막 장이 이랬습니다.
자료를 만들 때 쓸 만한 두 가지
- "최고의 자료는 잠재 질문의 90%가 부록에 답이 있다." 시장 규모, 경쟁 분석, 수익화 전략 — 한 장 넘게 설명해야 하는 건 전부 부록으로 내립니다. 본문은 짧아지고 Q&A는 강해집니다.
- "엔터프라이즈 계약 단 1~2건이 투자자에게 딜을 성사시킨다." 발표자는 첫 엔터프라이즈 계약(단독 ACV 약 $1M, 약 14억 원 — ACV는 연간 계약 금액)을 확보한 뒤 $3M(약 42억 원)을 조달했습니다. 기능을 스무 개 더 만드는 것보다 계약서 한 장이 빠릅니다.
그리고 방어 가능한 해자는 셋뿐이라고 했습니다
해자(moat)는 성 둘레의 물길에서 온 말로, 경쟁사가 쉽게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구조적 장벽을 뜻합니다.
| 해자 | 내용 |
|---|---|
| 물리 세계 | AI가 아직 물리적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 |
| 유통과 네트워크 효과 | 포춘 500대 기업의 다수에 침투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고객을 모으고 이탈시키지 않는 능력 |
| 독점 데이터와 규제 | 남이 복제하기 어려운 분석을 가능케 하는 데이터. 그리고 여전히 사람의 개입이 필요한 복잡한 규제 산업 |
모델을 잘 만드는 것은 목록에 없습니다. 세 번째 항목이 특히 중요합니다 — 규제 산업의 지저분함은 진입 장벽이지 감점 요인이 아닙니다.
50번 말해야 3건이 남습니다
세션 발표자는 첫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과정에서 약 50명의 투자자와 이야기했다고 말했습니다. 고객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흘간 137장을 찍고 돌아와 제 제품 문서를 다시 열었을 때, 고쳐야 할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기술의 가치를 수치로 변환하는 일이었습니다. 고객 환경에서 측정된 숫자 한 줄, 즉답할 수 있는 가격표, 두 번째 고객의 재사용률, 그리고 파일럿 전에 받는 서명 한 장.
다섯 개의 IR 자료가 저보다 앞서 있었던 이유가 기술이 아니었다는 것 — 그게 이번 서밋에서 제가 가장 비싸게 배운 문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