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다 증거
2026년 AI Summit 코엑스 전시장에서 찍은 사진 137장, IR 피칭 5개사, 기술 세션 10개 관람. 반도체 설비 지능화 플랫폼을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서 3일간의 기록에는 기술 이야기보다 "어떻게 팔아야 하는가"에 관한 것들이 훨씬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창업자에게 실제로 쓸모 있을 것 같은 여덟 가지를 정리했습니다.
01. 다섯 개의 IR 자료에서 뽑아낸 공통 규칙
AI Innovation IR Pitching Day에서 발표를 진행한 여러 스타트업의 도메인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었습니다. 하드웨어 설계 AI, 제조 운영 레이어, 기기 내장형 보안, 심전도 AI, 바이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방식과 패턴은 모두 동일했습니다.
| 기업 | 하는 일 | 무대에서 보여준 숫자 |
|---|---|---|
| SECA | 하드웨어 설계 AI (도면·회로도·BOM을 하나의 설계 그래프로) | 설계문서 검토 6시간 → 24분 설계공수 월 480h → 160h |
| 퓨처워크랩 | 제조 AI 운영 레이어 (업종 판단기준을 제품에 내장) | 생산 스케줄링 1시간 → 5분 불량원인분석 4~6시간 → 20분대 |
| 메디팜소프트 | 심전도 AI (심방세동 선제 예측) | 12개월 선행 AUC 0.963 등록환자 176,090명 |
| Biobytes | 근감소증 진단·신약 (종단 바이오뱅크) | 스크리닝 AUROC 0.903 현행 표준 SARC-F는 0.607 |
| ArbaLabs | 기기 안에서 도는 자율 AI 블랙박스 | 판단당 증거 0.04KB 배포 300~500KB, GPU 불필요 |
SECA의 특징
"검토 시간이 줄어든다"에서 머물지 않고 인당 연 4,700만원 ÷ 240 근무일을 계산해 설계 변경 1건당 150~200만원 절감이라는 단가를 만들었으며 이로써 구매팀이 결재 올릴 때 쓸 수 있는 형태로 숫자를 가공함.
메디팜소프트의 특징
경쟁사와의 대비표를 기능으로 나열하지 않고 예측 구간이라는 단일 축으로 세움. 12개월 대 1개월, AUC 0.963 대 0.79, 등록환자 176,090명 대 1,901명. 표 하나가 "우리가 다른 리그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
ArbaLabs의 특징
ArbaLabs는 공공 파일럿 3건 선정, 에어버스와 NDA(비밀유지계약), 국제 대회 2위까지 나열한 후 다음과 같이 현재의 상황을 정리함.
제품 설명이 아니라 고객 환경에서 측정된 숫자 한 줄. 그게 없으면 나머지 자료는 무의미합니다. 만일 아직 매출이 없다면 무엇으로 설득할 것인지 고민하고 명시하십시오.
02. 가격표 — 실제로 얼마를 받고 있나
B2B 창업자에게 가장 구하기 어려운 정보가 타사의 가격표입니다. 이번 IR에서는 세 곳이 실제 단가를 공개했습니다. 세 곳의 구조에 정의한 가격 구조는 서로 달랐지만 그 차이에서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 기업 | 가격 구조 | 설계 의도 |
|---|---|---|
| 퓨처워크랩 | 개념검증 3,000만 → 본구축 5,000만~2억 (단건) → 연간 운영 5,600만~1억3,600만 |
작게 시작해 갱신으로 넘어가는 3단 구조. 고객은 첫 결재를 3,000만원으로 통과시킬 수 있다. |
| SECA | 모듈당 연 2억 / 10명 유닛 객단가 = 모듈수 × 유닛수 × 2억 |
곱셈식 확장. 연 2억 → 6억 → 18억이 같은 계약서 안에서 일어난다. 고객사에 맞춰 시스템을 지어 주는 구축 대행(SI)은 배제 |
| ArbaLabs | 통합 €30~60K (1회) + 연 라이선스 €20~35K + asset당 €200~12,000/년 |
고객 자산이 늘면 자동으로 매출이 늘어나는 대수 기반 과금. 400대 → 1,200대에서 반복매출이 2배 |
공통점
- 티어드 패키징과 가격 체계가 명확하다. 고객은 Lite·Standard·Enterprise 처럼 현재 요구 수준에 맞는 에디션으로 시작하고, 사용 범위와 성과에 따라 상위 티어로 확장할 수 있다. 낮은 초기 진입 장벽과 명확한 업그레이드 경로가 영업 경쟁력이 된다.
- 세 회사의 자료에서 사업은 PoC, 구축, 반복 라이선스의 세 단계로 진화한다. 작은 범위에서 가치를 검증하는 PoC, 검증된 제품을 실제 고객 환경에 연결하고 배포, 매년 갱신되는 운영·라이선스 단계이다. SECA는 누적매출 7억 중 반복 라이선스 2.2억을 따로 정리하였고 심사 위원이 보는 포인트는 고정 매출이었다.
- 구축 대행(SI)은 명시적으로 배제한다. 매출은 있지만 꾸준하고 배수적인 수익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격이 완벽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고객이 “얼마예요?”라고 물었을 때 바로 답할 수 있도록 세 단계의 가격부터 정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단계가 일회성 매출이고, 어디서부터 반복 매출이 만들어지는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03. 고객은 가까이에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두 번 창업한 분의 세션이 이번 서밋에서 가장 실용적이었습니다.
마지막 항목이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심이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unfair advantage — 남들은 갖지 못한 나만의 강점은 어디서든 나올 수 있고, 그게 어디인지 정직하게 보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곧 첫 고객의 좌표입니다. 이미 반경 안에 있는 사람이지, 새로 찾아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Service-as-a-Software 파일럿
임원일 필요가 없다. 그 문제로 매달 야근하는 실무자가 최적이다. 이 사람이 사내에서 당신 대신 설득해 줄 수 있다.
아무런 연결 없이 임원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는다. 내부 전도사가 미팅을 주선하면, 그 자리에서 세 가지를 설명한다.
처음에는 무료로 시작한다. 대신 고객과 함께 해결할 업무 한 가지를 분명히 정한다.
파일럿을 시작하기 전에 서명받는다."기간이 끝난 뒤 성공이든 실패든, 계속 쓰겠다면 요금을 지불한다."
발표자는 이 방식으로 지난 회사에서 고객 3곳으로부터 $2M(약 28억 원)을 만들었습니다. 컨설팅으로 시작해 엔터프라이즈 SW 계약으로 전환한 매출이었습니다.
영업 대화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세 가지
| 요소 | 실제 문장 예시 |
|---|---|
| Pitch the impact | "우리는 귀사의 $100M(약 1,390억 원) 마케팅 예산에서 효율을 X% 개선할 수 있습니다" — 숫자가 먼저, 기능은 나중 |
| Show feasible path | "Google·Meta API를 이용해 사람 개입 없이 귀사 캠페인에 연결할 수 있습니다" — 어떻게 가능한지 |
| Convince leaders | "저는 복잡한 조직에서 이미 이걸 해봤습니다" — 왜 당신인지 |
가치를 전달하는 방식의 중요성
추가 개발 없이 수익을 만드는 네 가지 방법
세션에서 제시한 네 가지 방법 모두 제품을 더 만들지 않고 지금 상태로 돈을 받는 방법이다.
- 컨설팅 선행 — 내 시간을 컨설턴트로 팔고, 임팩트가 증명되면 SW 계약으로 전환. 계약서에 전환 조항을 미리 넣는다.
- 얼리 커스터머 딜 — 초기 제품을 시도하는 리스크에 대한 보상. 라이프타임 딜, 고정 단가.
- 디자인 파트너십 + LOI — 함께 제품을 다듬는 조건으로 무료 제공하되, 유료 전환 서약서를 받는다. 발표자는 자금조달 진입 시점에 LOI 5건을 들고 있었고, 그게 투자자에게 가장 강한 신호였다고 말함.
- 고객 범위를 바꿔본다 — 대기업의 긴 구매 절차에 막혔다면, 대표가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소규모 기업을 먼저 공략한다. 계약과 도입을 더 빠르게 시작할 수 있다.
04. 15영업일 가치 검증과 도입 판단
PoV는 Proof of Value, 가치 증명입니다. 기술적으로 되는지를 보는 PoC(Proof of Concept, 개념 증명)와 달리, "우리 돈 주고 살 가치가 있나"를 고객사의 숫자로 판정합니다.
착수 전에 합의하는 다섯 개의 기준
품질 · 처리시간 · 비용 · 통제 · 현업 사용성. 이 다섯 개의 목표치를 구현 시작 전에 문서로 합의한다. 종료 시점의 판정은 다음 중 하나이다.
| 판정 | 의미 | 다음 행동 |
|---|---|---|
| GO | 합의한 기준 충족 | 본구축 범위 설계로 진행 |
| 보완 | 가능성은 확인됐으나 조건 부족 | 범위·데이터·기준을 보완해 재검증 |
| STOP | 이 업무에는 맞지 않거나 결과가 미흡 | 추가 투자 중단 |
STOP이 선택지에 들어 있다는 게 핵심이다. 판정 기준 없이 시작한 PoC는 마무리 없이 흐지부지되며 결과적으로 아무런 교훈도 남기지 않는다.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결과는 지양해야 할 과정이다.
업무 하나를 15영업일로
과제 1건 · 대표 데이터 · 현업 담당자 · 보안 환경. 이 넷이 합의되지 않으면 착수하지 않는다.
지금 이 업무가 몇 시간 걸리는지부터 측정한다.
누가 무엇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여기서 정한다.
예외 케이스를 여기서 드러낸다. 데모에서 숨기면 배포에서 터진다.
GO / 보완 / STOP.
기간을 줄이는 핵심은 업무 하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05. 두 번째 고객에서 제품인지 용역인지 갈린다
B2B 딥테크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심사역 질문은 고정 매출이 있는가입니다. 이번에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을 세 곳이 각각 보여줬습니다.
퓨처워크랩: 지식을 3단계로 쪼갠다
| 레이어 | 내용 | 재사용 |
|---|---|---|
| 고객 누적층 | 그 회사만의 기밀, 사내 별칭, 작업 표준, 판정 기준, 결재선 | 불가 |
| 업종 패키지 | 같은 업종 전부에 해당하는 설비·공정·거래형태·업종 규정·판정 절차 | 가능 |
| 공통층 | 전 고객 공통 — 실체, 관계, 측정량, 물성, 규정 표현형식, 사고구조 | 가능 |
이 구조 위에서 그들의 확장 논리는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첫 고객은 3층 전부 신규, 같은 업종의 다음 고객은 1층만 신규, 같은 고객의 다음 업무는 신규 0. 원가 곡선이 어떻게 꺾이는지를 그림 한 장으로 보여준 것이다.
SECA: 70 대 30
같은 논점을 비율로 보여준다. 플랫폼의 70%는 산업 공통 자산이고 30%만 기업별 커스텀. 숫자 하나로 "우리는 매번 새로 만들지 않는다"가 전달된다.
Biobytes: 하나의 자산, 세 개의 사업
15년간 3개 병원에서 모은 종단 바이오뱅크 하나가 신약 타겟 발굴 · AI 스크리닝 · 건강기능식품 세 개를 동시에 운영한다. "One longitudinal data asset powers both target discovery and clinical phenotyping."
자료에 "동일 업종 두 번째 고객의 재사용률 X%, 도입 소요 Y일"을 넣을 수 있으면, "결국 고객마다 새로 만드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고객에게는 이미 만들어 둔 것을 그대로 재사용합니다. 새로 만드는 게 아니니 시간과 노동이 덜 들어가므로 매출이 두 배가 돼도 인력은 두 배가 되지 않습니다. 퓨처워크랩이 18개월 마일스톤의 첫 번째 증명 과제로 잡은 것이 정확히 이 이론을 보여줍니다. 아직 두 번째 고객이 없다면 그게 다음 목표라는 뜻입니다.
06. 좁고 깊게 — 문제 정의의 단계
기조 세션에서 나온 예시입니다. 어느 분야에도 단계 자체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 단계 | 질문 | 상태 |
|---|---|---|
| 1 | 우리 반도체 회사가 매출을 늘리는 방법은? | 넓고 얕음 |
| 2 | 메모리 반도체 제품의 수율을 올리는 방법은? | ↓ |
| 3 | 불량률 감소를 위한 품질관리 방법은? | ↓ |
| 4 | 데이터 분석을 통해 불량 원인을 식별하는 방법은? | ↓ |
| 5 | 특정 메모리 제품 웨이퍼의 불량 패턴(center, edge, scratch, ring, random, local)을 자동 감지하자 | 좁고 깊음 |
5번까지 내려가야 필요한 데이터에 집중되고, 성공 여부를 측정할 수 있고, 누가 돈을 낼지가 명확해집니다. 1번은 창업자에게는 야심작으로 집중하게 되지만 고객은 중요하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지금 회사 소개서 첫 문장이 위 단계에서 몇 번째인지 확인해보세요. 1~2번이면 아직 팔리지 않는 게 정상입니다. 범용성은 아키텍처 원칙으로 안에 두고, 밖으로는 5번 한 문장만 내보내는 편이 낫습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07. AI기본법은 이미 시행 중이다
기술 세션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언급된 날짜가 2026년 1월 22일이었습니다. AI기본법 시행일입니다. 여러 발표자가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근거의 문서화가 법적 요건이 됐다."
위험 등급에 따라 자율성을 설계한다
| 위험도 | 업무 유형 | AI의 역할 | 사람의 역할 |
|---|---|---|---|
| 낮음 | 조회 / 요약 | 자동 처리, 근거 제시 | 개입 없음 |
| 중간 | 초안과 추천 | 정책 검사 후 생성 | 담당자 검토 및 승인 |
| 높음 | 고위험 판단과 외부 실행 | 분석 / 제안 | 명시적 권한 · 최종 승인 · 감사기록 |
여기도 실제로 어려운 건 고위험 판단과 외부 실행이다. 이것은 기술 난이도가 아니라 책임 소재의 문제라서, 누가 승인하고 무엇을 기록으로 남길지를 고객사와 하나씩 합의해야 한다. 필자도 이 단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조사를 하고 검증 기간도 가장 길게 잡아 두었다. 위의 두 단계보다 훨씬 신중하게 천천히 가야 하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흐름이 바뀌고 있다
08. 투자는 AI에 몰리고 평가는 사업의 숫자로 한다
투자 동향 세션의 숫자를 보면 놀랍습니다. 2026년 상반기 글로벌 벤처투자 $510B(약 709조 원), 2025년 연간 전체($440B, 약 612조 원)를 여섯 달 만에 넘겼습니다. 1분기 기준 AI가 글로벌 벤처펀딩의 81%, 2년 전에는 30%대였습니다.
같은 세션의 마지막 장은 또 다른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창업자가 자료를 만들 때 쓸 만한 두 가지
- "최고의 자료는 잠재 질문의 90%가 부록에 답이 있다." 시장 규모, 경쟁 분석, 수익화 전략 - 한 장 넘게 설명해야 하는 건 전부 부록으로 내린다. 본문은 짧아지고 Q&A는 강해진다.
- "엔터프라이즈 계약 단 1~2건이 투자자에게 딜을 성사시킨다." 발표자는 첫 엔터프라이즈 계약(단독 ACV 약 $1M, 약 14억 원 — ACV는 연간 계약 금액)을 확보한 뒤 $3M(약 42억 원)을 조달했다. 기능을 스무 개 더 만드는 것보다 계약서 한 장이 훨씬 이득이다.
방어 가능한 해자는 다음 세 가지
해자(moat)는 성 둘레의 물길에서 온 말로, 경쟁사가 쉽게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구조적 장벽을 뜻한다.
| 해자 | 내용 |
|---|---|
| 물리 세계 | AI가 아직 물리적으로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 |
| 유통과 네트워크 효과 | 포춘 500대 기업의 다수에 침투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고객을 모으고 이탈시키지 않는 능력 |
| 독점 데이터와 규제 | 남이 복제하기 어려운 분석을 가능케 하는 데이터. 그리고 여전히 사람의 개입이 필요한 복잡한 규제 산업 |
좋은 모델은 경쟁사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규정과 현장 절차를 실제로 해결해 본 경험은 쉽게 복제할 수 없다. 규제가 많은 산업의 복잡성은 약점이 아니라 경쟁사를 막아 주는 진입 장벽이다.